이성숙 기자
내가 마시는 커피 한 잔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일반 커피에 비해 약간 비싼 값을 지불하더라도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커피를 마시는 ‘착한 소비’를 한다면 ‘아름다운 나눔’으로 이어지고 세상은 차츰 바뀌어 갈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서울특별시 예비 사회적 기업 트립티를 꾸려가고 있는 사람들, 그 중심에 최의팔 대표가 있다.
1990년대 중반,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인권문제에 관심을 갖고 서울이주민노동자센터를 설립해 운영해 온 최의팔 목사가 한국에 들어온 이주노동자들 중 질병이나 산업재해로 장애를 입은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줄까 고심하던 끝에 시작한 것이 트립티 사업이다. 2009년 5월부터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커피를 직접 로스팅해 판매를 시작하고 2013년부터는 서울특별시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인가 받아 현재 신촌 본점을 비롯해 신수점과 서강대점을 직영점으로, 태국과 베트남, 네팔 등 해외로 확장해가고 있다. ‘트립티(Tripti)’는 산스크리트어로 “아, 좋다!”, “맛있다!”라는 뜻의 감탄사다. 수익금으로 산재 쉼터 운영 지원, 아시아 소외계층 지원 사업을 하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커피
최 대표는 원래 커피를 마시면 저녁에 잠을 자지 못하는 체질이라 커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트립티 사업을 시작하면서 로스팅부터 배웠다고 한다. 원두를 납품하다보니 카페 매장이 필요했는데 2009년 4월, 친구가 하는 카페에 원두를 팔러 갔다가 뜻하지 않게 카페를 인수 하게 되었다.
“정신과 의사였던 친구가 환자들이 편한 마음으로 상담 받게 해주려고 카페를 시작했는데 1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며 그냥 넘기겠다는 겁니다. 제안을 받고 한 시간 만에 계약을 한 거예요. 사업적인 마인드는 없었던 거죠. 주변 상권이 어떤지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결정했으니까요.” 가게를 인수하고 제조허가를 냈다. 힘은 들었지만 즐거웠다. 건실하게 운영하다보니 ‘트립티’라는 이름으로 매장을 내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여수 트립티의 경우 트립티의 취지에 공감을 했지만, 더러는 이름만 사용했다. 프렌차이즈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관리를 할 수가 없었다. 더 이상 이름을 내주지 않았다. 기업으로서 내구성이 생기면서 2013년 4월, 서울시에 예비 사회적 기업 신청을 했다. 사실, ‘트립티’를 시작할 때 처음부터 사회적 기업으로 하라는 유혹도 있었다. 하지만 노동부에서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던 초창기에 이주민을 위한 극단 ‘샐러드’와 이주방송국 ‘샐러드’를 했는데 실패한 경험이 있었다. 방송국에 15명, 극단에 30명 등 약 50명의 직원이 있었는데 사회적 기업이라는 특성으로 인해 고용이나 운영에 문제가 생겨 2년 만에 문을 닫았던 것이다.
‘트립티’는 서울특별시 예비 사회적 기업으로 일자리 창출이 목적이 아닌, 공정무역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기타 항목으로 인가를 받았다. 처음 설립 취지에 맞춰 이주 장애인을 교육시켰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이주노동자들은 비자 기한 초과로 문제가 있었고, 치료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교육을 받는 것도 어려워했다.
“한국에 노동자로 들어와 열심히 돈을 모은 황반 씨는 베트남으로 돌아가 카페를 열었어요. 트립티에서 착실히 교육을 받고 돌아가 3층 건물을 짓고 로스팅 까페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지요.”
미얀마 사람 아웅나윈 윙의 경우는 좀 달랐다.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다가 설암에 걸려 장애를 입고 트립티에 와서 열심히 배웠지만 본국으로 돌아가 보니 돈이 많이 필요했다. 한국에서 번 돈은 병원비로 다 쓰고 수중에 돈이 없었다. 카페를 열 자금 마련에 도움을 주고자 모금운동을 펼쳤지만 원하는 만큼 채워지지 않았다. 태국 치앙마이에 난민 자녀들을 교육시켜 독립시키기 위해 카페 겸 교육센터를 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라오스, 캄보디아, 인도, 중국 등 해외에 나가 있는 선교사들이 도움을 요청해오지만 자금 마련에는 관여하지 않고 커피 기술 전수와 아이디어만 제공해 주고 있다. 작년에 네팔에 지진이 발생한 후 단순히 구호가 아니라 근본적인 대책으로 바리스타 학원을 세우고 가난한 농촌에 커피나무를 심는 운동을 폈다. 커피 묘목 심는 운동은 한국에서 5백여 명이 참여했으며, 네팔에 사회적 기업 트립티를 세우는 데는 (사)함께 일하는 재단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네팔 트립티에는 한국에서 20여 년 동안 체류했던 목탄 미놋이 대표로 일하고 있다.
최 대표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 들어오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각 나라가 발전해서 노동력을 파송하지 않을 수 있도록 공정무역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생산자에게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소비자에게도 질 좋은 제품을 적정 가격에 소비하도록 하는 것이 공정무역의 취지다. 트립티에서는 바리스타 전문교육은 물론 중·고등학교 직업체험교육, 공정무역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런 성과로 서울시장 상, 서울시 교육감 상도 수상했다.
독일 교회를 배우다
최 대표는 대학에 진학하면서 교회에 나가기 시작해 3학년 때 세례를 받았다. 기독 학생으로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한모임’을 결성해 활동하던 무렵 그의 고민은 “기독교인이 이 사회에서 어떻게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국 교회를 위하려면 한국 교회를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크리스챤신문 기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다. 편집부장이 되면서 신학의 필요성을 절감해 신학대학원에 진학했다. 한 학기를 막 마쳤을 즈음 신군부의 언론탄압의 칼날이 그에게도 닥쳤다. 기독교 교계 기자도 몇 명 강제해직되었는데 그중 한 명으로 해직기자 대열에 끼게 된 것이다. 덕분에 신학 공부는 더 착실히(?)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신학공부를 마치고 크리스챤아카데미에서 대화담당 부장으로 3년 간 활동하다가 독일로 유학을 갔다. 독일 교회가 사회문제를 어떻게 접근하고 해결하는지 배우러 간 것이었다. 처음에 머무른 곳은 보쿰, 탄광 지대였다. 그곳에서 한국에서 파송된 광부들을 만났다. 최 대표가 독일로 간 1980년대 후반 광부, 간호사 출신의 우리 교민들은 그 사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독일로 간 사람들은 국가 대 국가 쌍무계약에 의해 갔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2개월은 독일어 공부를 시켜주었다.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노동자들에 비하면 월등하게 좋은 조건이었던 셈이다. 게다가 독일 교회는 한국 교회로부터 목사 6명을 초빙해와 한국인 광부, 간호사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하게 했다고 한다.
저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청암교회에서 시무했다. 후배의 강력한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청암교회 교인들은 대다수가 노동자였다.
“어느 날 중국 한인 노동자들이 단속을 피해 우리 교회로 피신을 왔어요. 우리 교인들은 자기 일자리를 빼앗는 사람들이라 하여 처음에는 싫어했죠. 그러다가 함께 여름수양회를 하게 되었는데, 한인들은 손이 무척 빨라 만두 800개를 순식간에 만드는 거예요. 함께 음식을 나누면서 ‘저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들이구나’ 라고 우리 교인들의 생각이 바뀌었어요. 이주노동자들을 같은 인간으로 보게 되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그들을 돕기 시작하게 됐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우리나라에 외국인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수는 2백여만 명에 육박하고 있다. 심화되고 있는 저출산과 고령화 추세에 비추어 볼 때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이주민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2050년경에는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0%가 외국인으로 채워질 것이라 추정하기도 한다. 이미 다문화사회로 접어든 한국 사회에서 이주노동자는 피부색이 다를 뿐 우리의 이웃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권 탄압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면서 1990년대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시민사회단체들이 생겨났다. 최 대표는 1996년에 준비위원회를 꾸려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를 창립했다. 이후 외국인 이주노동자의 인권 보호와 인권 신장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고 지원 활동을 해왔다. 노동·의료·생활상담은 물론 외국인 이주노동자 문제에 대한 각종 조사·연구·교육·언론홍보 활동을 통해 외국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 개선에 크게 기여했다. 긴급한 상황에 처한 외국인 이주노동자를 위한 쉼터를 제공함으로써 한국 사회에 대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개선하는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
최의팔 목사는 거리에서 데모도 많이 했다.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하려는 마음이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선교연대, 이주민건강협회, 선한이웃클리닉, 국제이주연구소 등 그가 관여한 단체 외에도 우리 사회의 부정과 부조리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소신껏 행동을 해왔다. 그런 그에게 믿음이란 무엇일까?
생명 존중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최 대표는 한국 기독교인들이 믿음이 무엇인지, 종교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 현재를 사는 종교, 지금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서의 삶에 대한 고민 없이 미래의, 저 세상에서의 행복을 꿈꾸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믿는다고 고백하면 믿음이 있는 건가요?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자기 성찰을 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교리 위주의 ‘무조건 믿어라’에서 이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야 할 시점에 왔어요. 종교가 무엇인지, 기독교가 무엇인지 본질에 대해 성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에서 존경받을 수 있어요. 무조건 교회로 오라고 하면 미래가 없어요.”
최 대표는 생명 존중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다고 믿는다. 한국 교회가 1970년대 경제 성장과 함께 성장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생겼는데 그것을 탈피하려면 이제는 축복이나 경제 논리를 지양하고 이웃을 따듯하게 보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적 기업이 본래의 취지를 이루기가 쉽지 않음도 토로했다.
“일반 기업과 경쟁해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아요. 사회적 기업의 5년 후 생존율도 일반 기업과 비슷합니다. 10% 이내죠. 거의 문을 닫아요.” 최 대표는 사회적 기업이 당면하는 문제로 네 가지를 꼽았다. 어떻게 좋은 제품을 만드느냐, 판매를 어떻게 하느냐, 경영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하는가, 부족한 자본을 어떻게 확보하는가 등이다. 사회적 기업이 사회적 약자의 고용 창출을 위한 측면이 강하기 때문에 경쟁력이 떨어지는 현실에서 공공기관이나 공기업에서 제품의 질을 따지기보다 사회적 기업의 정신에 따라 제품 구입에 앞장서주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더욱이 기독교 사회적 기업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 사회적 기업과 함께하는 교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최 대표는 한국 교회가 돈으로 돕기보다 기술과 교육을 통해 사회적 약자나 이주노동자들이 자립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가는 데 동참해 줄 것을 당부했다.
석유 다음으로 세계 물동량이 많다는 커피를 통해 제3세계에 희망을 심고 나누는 트립티의 사업 확장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커피원두 납품, 까페 매장 컨설팅, 바리스타 교육, 케이터링 서비스에서 공정여행까지. 특히 공정여행은 아시아를 이해하기 위해 베트남, 태국, 미얀마, 네팔 등 현지 트립티 매장을 중심으로 커피 산지와 그 나라 문화체험까지 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트립티에 대한 문의 02)762―9472 또는 tripti.co.kr